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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춘추] 위대한 연구소를 향하여
- 등록일 : 2023-03-03
- 조회수 : 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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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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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진 KIST 원장
바쁜 일상에서 꾸준히 운동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연구소의 경영 업무를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그랬다. 바쁘다고 운동을 못 하니 체력이 달리고,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듯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새벽 조깅이다. 새벽 조깅은 어둠 속에서 내 호흡과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이 시간에만 볼 수 있는 으스름달과 서서히 피어나는 여명은 덤이다. 특히 이맘때가 되면, 3년 전 연구소의 원장직 지원을 앞뒀던 당시의 남달랐던 각오가 떠오르곤 한다.
실험실에서 20년, 경영자로 10여 년을 보낸 경력 내내 한 가지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뛰어난 과학자가 일하고 싶은 연구소의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 선후배, 동료 연구자들과 토론하고, 수많은 성공과 실패 사례를 접한 끝에 나름의 답을 얻었다. 그리고 지난 2년 반 남짓한 기간 동안 신념을 갖고 변화와 혁신을 위해 전념해 왔다.
먼저 위대한 연구소에는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선진국 반열에 오른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은 이제 더 이상 다른 나라를 모방하거나 추격하는 전략에 기댈 수 없다.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이런 도전은 열에 아홉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 아홉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도전할 수 있도록 시스템과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관장이 된 뒤 처음 착수한 것이 평가제도의 혁신이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세계 최초, 최고를 목표로 도전해야 할 과학자들을 획일적인 지표로 줄 세우는 평가는 개발도상국 시절에나 통용되는 낡은 방식이다. 실적을 채우기 위해 논문 편수 채우기에 연구자들을 내몰지 않도록 평가지표도 손질했다. 특허 출원, 등록은 아예 지표에서 빼버렸다. 그랬더니 꼭 필요한 기술이 출원되는 등 특허의 질이 좋아지고, 활용률도 높아졌다. 제도 혁신 후 2년이 채 되지 않아 가시적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이 더욱 고무적이다.
위대한 연구소에서는 연구자들이 자존감을 갖고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연구자는 논문 쓰고 특허 내서 기술이전하면 성공한 것 아니냐'는 시선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책연구기관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연구를 천직(天職)으로 여기고 사명감을 갖고 몰입할 때 비로소 국가와 사회를 위한 성과가 나올 수 있다. 어쩌면 그 결과물은 논문이나 특허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려면 연구자들이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 세계적 인재들이 모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박사후연구원부터 시니어 연구자에 이르는 경력 개발 경로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도 어김없이 새벽 조깅에 나선다. 겨울이 지나며 해돋이가 빨라져 동녘이 점점 빨리 밝아진다. 가끔은 연구소의 밝은 미래를 향해 동료들과 함께 뛰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늘도 이 땅의 많은 과학기술인들이 세계 최고를 목표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